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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감 독의 오펜하이머가 2023년 7월 21일 개봉했습니다.
이 영화는 놀란 감독의 최초 전기 영화이자, 원자폭탄의 아버지라 불리는 미국의 과학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일생을 다루고 있는 영화입니다.
놀란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차근차근 살펴보면, 장르를 다루는 그 재능을 엿볼 수 있죠.
메멘토를 시작으로 인셉션이나 인터스텔라, 다크나이트, 최근에 이르러서는 테네시 등과 마찬가지로, 이번 오펜하이머 또한 여러 측면에서 매우 도전적이면서도 야심 찬 작품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오펜하이머가 그 완성도와 스케일, 또는 인기와는 별개로, 이번에도 다각도로 해석할 수 있는 많은 부분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죠.
그런 만큼 이번에는 오펜하이머 속 다양한 특징들과 장면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컬러와 흑백의 대비로 표현된 분열과 융합

 

본 영화의 가시적으로 보이는 가장 큰 특징은 역시 컬러 화면과 흑백 화면의 대비가 아닐까 싶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얘기해 보면, 오펜하이머의 기밀 접근 자격 청문회가 시작되는 1954년은 분열이 일어난 챕터로 컬러로 보이며, 슈트라우스의 상무부 장관 임명 청문회는 1959년 융합이라는 챕터로 흑백 처리로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오펜하이머의 청문회와,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절부터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메나타운 프로젝트까지의 시절을
오펜하이머의 청문회 시간대 속 회상을 통해 껴안는 형태로 보여, 크게는 2개, 세밀화하면 3개의 시간대로 구성이 됩니다. 영화는 이 세 개의 시간대가 교차하며 진행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죠.
흥미로운 부분은 슈트라우스의 청문회 시간대가 흑백으로 처리된 곳에 있을 것입니다.
일반적인 영화는 과거 시점을 표현하는데, 대부분 흑백을 사용하죠.
놀란 감독이 처음으로 흑백 화면을 사용한 메멘토의 경우도 과거를 표현할 때였습니다.
이 두 화면의 차이로 얻을 수 있는 효과는, 두 인물 사이의 대비를 강하게 부각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일단 본 챕터의 제목 또한 융합과 분열로 상반된 것을 알 수 있죠
희대의 천재이며, 맨해튼 프로젝트 이후 수소폭탄 개발 금지까지 세간의 이슈에 항상 서 있던 오펜하이머.
구두 판매원에서 시작해 악착같이 지금의 자리에 올라왔으며, 그림자 속에서 기회를 엿보던 슈트라우스.
일단 삶의 태도부터 수소폭탄에 대한 주장 등 많은 것이 상반되는 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그 상반되는 입장으로 인해 둘이 본격적으로 갈라졌다는 것도 재미있는 부분이죠.
그렇기 때문에 오펜하이머와 더불어 본 영화의 한 축을, 오펜하이머와 같은 높은 인지도에 있는 다른 과학자가 아닌 슈트라우스를 선택한 것도 이야기를 더욱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슈트라우스의 시간대가 미래임에도 불구하고 흑백 화면으로 표현됐는지 의문점이 남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과거 이전, 슈트라우스가 회상하는 오펜하이머는 굉장히 주관적인 입장으로 서술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슈트라우스가 기억하는 오펜하이머의 행동은, 과학자들에게 자신의 험담을 했다는 주장 등 모두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는 시간대가 미래라고 해도 미래라고는 볼 수 없으며, 어쩌면 슈트라우스 한 사람의 주장이라는 점이 좀 더 강하기 때문에, 영화는 슈트라우스의 시간대를 흑백으로 처리하는 선택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오펜하이머가 양자역학을 전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행동은 굉장히 상충되면서, 또 어떻게 보면 충동적이고 일관되지 않은 모습을 보입니다.
이런 오펜하이머의 행동은 그 자체로 양자 역학에 대한 비유라고도 보일 수 있는데요 이는 영화에서 설명하는 양자 역학의 성질과 깊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양자역학은 모순의 과학이라고 흔히 말하는데요 그 이유는 양자역학의 근간을 이루는 빛의 성질과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펜하이머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뉴스 보어의 말대로, 양자 역학은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에너지와 역설적인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빛은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고, 관측되기 전까지는 존재해도 확률적으로만 존재하는 상반되는 성질이 동시에 존재하는 모순을 안고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양자역학처럼, 오펜하이머 또한 영화에서 굉장히 상대적이고, 상보적이고, 또한 불확정적인,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불근 절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는 여러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는데요.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다소 엽기적인 사과와 관련된 이야기에서는 오펜하이머의 이런 비합리적인 면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지도교수인 페트릭 블랙키스를 사과에 독극물을 넣어 살인하려고 한 일화가 그것인데요.
이 이야기는 그 자체로 독극물을 넣은 사과를 원작 포탄으로 은유하기도 하지만, 오펜하이머라는 인간이 얼마나 충동적이고, 반대로 또 감성적이고 본능적인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 외에도 아내인 케이트와 아들인 피터 사이에 불화가 일자, 보모에게 아이를 입양을 권유하기도 하는 황당한 면모를 보이기도 하고, 결혼 이후에도 전 연인이었던 진텍트럭과 계속 만남을 이어온 것까지, 감성적이고 충동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아마도,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비합리적인 면 때문에, 영화에서 오펜하이머를 지혜롭지 못한 천재라 칭했을지도 모르죠.
그래도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모순적인 일은, 히틀러의 사망 이후에도, 영화에서 알 수 있듯이,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의 완성을 강하게 추진했다는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데, 어떤 높이에서 떨어뜨려 살상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지 많은 계산도 거쳤다고 하네요.
하지만 원자폭탄의 투하 이후에는 수소폭탄 개발을 윤리적 문제로 강하게 반발하며 강경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이 같은 원자폭탄의 돌변한 태도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다른 가설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영화에서 보여줬듯이, 원자폭탄이 떨어진 이후의 참사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죠.
이에 대한 근거는 트루먼 대통령과의 일화에서 알 수 있습니다.
원자력연구소를 더 맡아달라는 트루먼 대통령의 요청에, 오펜하이머는 '내 손에 피가 묻어 있는 것 같다'는, 과학자로서 아주 감정적인 발언을 하기도 하죠.
그러나 오펜하이머가 왜 그렇게 수소 폭탄을 반대했는지를 생각하면, 그의 업적이 평범해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에드워드 텔러가 고안한 수소 폭탄은 원자폭탄보다 훨씬 더 강력한 위력을 지녔으며, 오펜하이머는 에드워드 텔러가 본인을 대체할 수 있는 인물이 될까 봐 불안했던 것일 수도 있죠.
이제 또 오펜하이머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일 것입니다.

 


오펜하이머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오펜하이머는 본인을 미국의 애국자라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열렬한 공산주의, 사회주의 운동의 후원자였죠.
이에 대해서는 오펜하이머가 왜 이렇게 공산주의 운동에 심취해 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이를 오펜하이머의 태도와 연관 지어 설명하는데요. 그것은 아마도 끝없는 실험 정신과 진취적인 태도와 연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영화 초반, 오펜하이머는 피카소의 팔짱 낀 여인,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엘리어스미스의 황무지에서 영감을 받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서로 연관이 있는 듯 없는 듯한 이 세 예술 작품은 사실 하나의 공통점으로 연결되어 있는데요. 바로 당대에는 저평가받을 정도로 혁신적인 작품이라는 게 공통점이죠.
이 셋 모두 오펜하이머를 둘러싼 서구사회가 20세기 현대에 들어섰음을 의미하며, 청년 오펜하이머의 감정, 그의 이론의 학문적 혁신성, 나아가 그가 주도하게 될 맨해튼 프로젝트와 그 이후의 미래를 암시하는 장치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당시 새로운 이념이자 철학인 공산주의는 또한 오펜하이머에게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와 더불어 진테트록이라는 공산단원 애인을 두게 된 오펜하이머는 자연스럽게 더욱 공산주의에 빠지게 되며, 사회의 부조리를 자신이 막아야겠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게 됐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이 모든 일련의 사건들이 결국 어떠한 구조를 띠고 있다는 것인데요.
이를 좁은 의미에서 보자면, 원자폭탄을 둘러싼 개인의 의견과 행동이 결국 연쇄 작용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입니다.
이 연쇄작용이 처음 언급된 것은, 핵 버튼을 눌렀을 때, 핵분열의 반응이 끝나지 않고 세상을 멸망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었죠.
그러나 영화에서 언급한 연쇄 작용은 단순히 핵분열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영화에서 더욱 중요하게 언급한 연쇄 작용은 아마 개인이 빚어낸 행동 하나하나가 비롯한 거대한 흐름과, 또 그로 빚어낸 결말을 뜻하는 것일 겁니다.
원자 폭탄을 인류의 손에 쥐어준 이는 오펜하이머였고, 그 시적은 나치를 막아야 한다는 대의명분도 있었지만, 그저 할 수 있다는 호기심이 더 컸을 뿐이었죠.
결국 이런 적은 호기심과 가능성으로 오펜하이머는 인류가 스스로 멸할 수 있는 힘을 준 것입니다.
그런 원자폭탄의 아버지를 파멸시킬 이는 스트로스였습니다.
스트로스는 아주 사소한 착각, 그리고 열등감으로 오펜하이머를 무너뜨리려 했죠.
그 작고 별거 아닌 작은 오해가 연쇄 반응을 일으켜 여러 사람의 운명을 파멸시켰습니다.

심지어 스트로스 본인조차 말이죠.
극 중 잠시 나오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핵폭탄의 책임자는 나인데 왜 당신이 책임감을 느낀다고 징징거리냐라고 신랄하게 비아냥거린 트루먼 대통령이 있었죠.
어쩌면 영화에서 나온 모든 권력의 정점인 그 또한 연쇄 작용에서는 자유롭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역사적인 인과관계를 따지면 트루먼 대통령은 투하 몇 달 전 취임 직후에야 수년 전부터 개발 중인 원자폭탄의 존재를 알았고, 개발에 제대로 관여한 것도 없이 폭격을 명령하게 된 신세였죠.
오펜하이머를 조롱한 세계 권력의 정점조차 원자폭탄의 원리 발견, 맨해튼 프로젝트 원폭 투하라는 연쇄 반응을 거스를 수 없는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펜하이머의 수소폭탄 반대는 그 흐름을 역행하는 개인의 노력이라 볼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오펜하이머는 결국 그 거대한 흐름에 고립되고 먹히는 희생자의 위치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결론 : 막을 수 없는 운명적 흐름에 그저 미약하기만 한 인간

 


놀란 감독은 오펜하이머가 원자 폭탄을 만들지 않았다면 세상은 지금과 달랐을까라는 질문에서 이와 비슷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원자폭탄의 발명은 시대에 막을 수 없는 흐름이었고, 오펜하이머가 이를 포기했어도 언젠간 다른 이가 발명을 했을 거라는 말이죠.
즉 막을 수 없는 흐름이라는 다소 운명론적인 법칙이 영화뿐 아니라 세상에도 적용이 되고 있다고 놀란 감독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실 우리도 막을 수 없는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떠다니고 있을 뿐인 피해자일 뿐입니다.
통제 불능 사건이 세상에 번져나가는 시대에 말이죠.
인간이란 때로는 얼마나 미약한가.. 그것이 이 영화가 스산하게 두려워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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